본업과 주유 전편 사말사 1~7화

본업과 주유 전편 사말사 1~7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단체, 사건 등은 사실과 무관하며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프롤로그

주유의 사전적 의미 :

1. 명사 자동차 따위에 기름을 넣음

2. 명사 기계나 기구의 마찰 부분에 기름을 침

본업의 사전적 의미 :

1. 명사 주가 되는 직업

14년 사귄 내 남자친구와

그의 섹스 파트너의 대화를 발견한 이야기

그리고 알게 된 본업과 주유의 의미

사말사 (些末事)

: 자질구레하여 중요하지 아니한 일

1화

평범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연애

평범한 연애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고 가끔은 여행을 가고 또 가끔은 기념일을 챙기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그냥 연애였다.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10년째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그가 우리 엄마 집에서 데릴사위처럼 나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공부를 하던 그가 시험에 합격한 것은 작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스케줄 근무를 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평일에도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가을의 끝자락에 주정시의 한 구청 주차행정과에서 첫 출근 연락을 받은 그를 축하하기 위해 함께 그 자리에 가서 꽃도 증정하고 그의 첫 공직 생활을 응원했다. 그게 2022년 9월 말 이었다.

위태로웠다. 그의 합격과 함께 나는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기회로 좋은 집을 찾게 되었을 때 무턱대고 계약을 해버렸다. 물론 그는 부동산 관련하여 돈을 한 푼도 내지 않았고 내 대출과 엄마의 대출로 구한 집이었다.

계약을 했다는 말에 기뻐할 줄 알았던 그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우리 엄마 집에 계속 얹혀살며 돈을 더 모으던지, 혼자 자취를 시작하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이미 5년 가까이 함께 우리 엄마 집에서 함께 산 그가 따로 살 거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훗날 그는 그 아파트를 계약한 것이 자기가 선택할 수 없지만 따를 수밖에 없던 최악의 선택이라고 말해줬다.

집은 오피스텔이나 옵션이 다 갖춰진 원룸이 아니었기에 모든 가전제품과 가구를 구해야겠다. 나는 첫 둘만의 동거에 대한 설렘, 기쁨에 취해 이것저것을 알아보고 구했지만, 그의 표정은 늘 어두웠다. 그러나 우리는 예정대로 함께 키우던 반려견 ‘안이’를 함께 데리고 나와 살게 됐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2023년이 됐다.

2023년 4월

그 사이 우리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안이가 당뇨에 걸리며 앞이 안보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안이에게 매일 일정한 시간에 두 번의 밥을 주고, 두 번의 인슐린 주사를 놔야 했다. 스케줄 근무를 하는 나와 가끔 당직을 서야 하는 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또 우리는 엄마의 도움을 빌려야 했다.

엄마는 항상 피곤해 보이는 그를 무척이나 신경 썼다. 차가 없던 엄마지만 절대 태워 달라 하시거나, 데려다 달라고 하시지 않고 버스를 타시거나 왕복 12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 다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엄마 집에 살던 시절에 이어 새로운 형태의 동거가 시작됐다. 마치, 맞벌이 부부의 집에 아이를 봐주러 오는 장모님처럼, 우리 엄마는 매일 그 먼 길을 오가며 일정한 시간에 안이의 밥을 챙기고 주사를 놓으시기 시작했다.

2023년 5월

엄마가 고생하며 노력해주신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일까, 내 앞에선 늘 어둡고 우울한 마음을 내비치던 그가 주사 지옥을 피해 술자리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술자리에 빠진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제 그와 나, 둘이 하는 식사는 고사하고, 같이하는 시간 자체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우리가 무조건 함께하던 일정은 안이의 병원에 가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마저도 가지 않기 시작했다.

나는 온몸을 휘감는 불안함에 그에게 질문을 해버렸다.

“재원아, 네 미래에 내가 있는 거 맞아? 네 인생에. 만약에 내가 없다면 그만하자.”

사실 내 모든 용기를 끌어쓴 질문이었고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듣고 싶었던, 답이 정해져 있던 물음이었다. 그렇게 묻기까지 나는 이미 수없이 울고 수없이 밤을 새우곤 했다.

그는 그저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원하면 혼인신고도 해줄 수 있어. 그냥 난 요즘 우울해. 네가 볼 때는 매일 술자리 나가고 하하 호호 웃으며 행복해 보이지만 지금 내 인생에서 최고 우울해.”

그가 우울하다. 그가 아프다는 답변이 나를 오히려 안도하게 했다. 차갑기만 한 그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며 스스로 다독이게 됐다.

그렇다. 나는 그가 우울하다, 아프다고 한 답변 하나로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슬픔과 작별 후,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그를 응원하고 보살필 준비가 된 것이다.

그 말을 한 날도 그는 구청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위해 우는 나를 뒤로하고 나갔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새벽 네 시 가까운 시간 술에 절어 귀가를 했다.

그렇게 나의 혼자 하는 연애가 시작됐다.

아마 그 말이 안되는 연애는 진작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마음이 아파 방황하고 있다고 믿었다. 아픈 진실을 피해 나 스스로를 속인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많이 아프고 많이 우울한 그가 원할 때 바로 갈 수 있게 주정시에 있는 정신의학과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개의 병원을 추려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했지만, 그는 안이의 병원비가 밀려 돈이 없으니 7월에 가겠다는 말뿐이었다. 그가 말하는 병원비는 그 혼자만 감당 하던게 아닌, 나와 내 엄마도 함께 내고 있었으나 왜 자꾸 돈이 없다고 하는지 회피인지 싶었다.

지금 와서 하는 말하지만, 그는 내가 보낸 정보들을 읽지도 않고 답변했으리라.

2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법

2023년 6월

그에게 아프고 우울하다는 답변을 받았지만 어째선지 이제는 내가 우울하고 매일 눈물바람인 날이 계속되었다. 사귀는 동안 서로의 휴대전화는 공용의 것처럼 비밀 없이 공유하던 물품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가 14년 만에 비밀번호를 바꿨다.

그리고 어느 날은 메신저에 있던 나와의 사진을 전부 삭제하기도 했다.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거의 삼 년 만에 휴대전화 배경화면도 바꿨다.

그러한 행동들에 대해서 그에게 물어보자, 그는 그저 자신이 너무 우울하기에 그동안 해왔던 걸 다 바꿔본 거라며 일단락했다.

배경화면도 어디서 구했냐는 물음에 그저 ‘그냥 했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배경화면은 마치 철저히 외로워진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연두색 테니스공이 여러 개 있는 굉장히 밝은 그림이었는데 외로움에 잠식된 나와 상반되어 상큼하고 발랄해 보였다.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었던 그의 휴대전화는 굳게 잠겨있었다. 나는 그 발랄한 테니스공들이 미워졌다.

그 잘난 테니스공이 미워 나도 그걸로 바꿔 달라고 어디서 구했냐고 했으나 그는 자연스럽게 대화 화제를 돌릴 뿐이었다.

또한, 그는 함께 잠자리에 들 때면 휴대전화를 자신의 베개 밑에 밀어놓고 잠들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핑계로는 이미 8년이나 함께 산 우리의 반려견 안이가 발톱으로 휴대전화 액정을 긁을까봐라고 했다. 그때는 그것도 ‘우울함에서 오는 방어적 태도인가 보다’ 하고 아픈 남자친구를 속으로 위로하며 또다시 내 자신도 방어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은 그저 헤어드라이어 선이 엉켜 있을 뿐인데, 내 인생 전체가 엉켜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드라이기를 붙잡고 엉엉 울기도 했다.

그 순간에도 남자친구는 인재개발원에서 만난 1조 친구들과 술을 먹는 중이었다.

그랬다.

나의 2023년 6월은 그저 눈물의 연속이었고, 나 혼자 스스로를 응원하고 자립하는 방법을 찾아야겠다며 합리화하는 달이었다. 그러면서도 아프다는 재원을 어떤 방법으로 지켜줄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달이었다.

그게 나의 6월이었다.

2023년 7월

그가 느닷없이 혼자 일본 나고야로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얘기를 했다.

워낙 일본 여행은 좋아하던 그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그는 나와 휴일이 겹쳤음에도 혼자만의 여행을 꼭 가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혼자 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런가 보다 했다. 그는 또한 넓은 침대만 써버릇해서 그런지 일 인실은 불편할 것 같다며 큰 침대가 있는 이인실을 같이 찾아봐달라고 했다. 우울한 그가 자기 자신의 리프레시를 위해 여행을 한다는 것, 그 준비를 도와달라는 것, 그렇기에 열심히 도와줬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여행을 가려던 그는 하필 금요일에 폭우가 내려 비상 근무에 걸려버렸다. 비상 근무가 해제되어야지만 집에 갈 수 있었는데 계속되는 폭우로 인해 그는 자정이 지나도록 집에 올 수 없었고 그의 여행 짐까지 내가 챙겨주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비상 근무는 해제될 줄 몰랐고 나는 그의 짐을 챙겨서 그가 일하는 구청 주차장에 주차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이미 새벽 세 시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비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의 공항버스 탑승 시간은 이십분 밖에 남지 않았고, 그는 구청에 갇혀 버린 것처럼 나오지를 못했다.

나는 왜 이 여행에 이토록 집착하냐며, 이번 비행기는 취소하고 다음에는 비상 근무일 때 여행을 짜지 말라는 교훈으로 삼으라고 했으나 그는 그 새벽에 결국 대체 근무자를 찾아 나와 달라고 부탁을 가장한 통보까지 하고서야 떠났다. 내가 싸준 짐을 갖고 내가 태워다 준 차를 타고 나고야로 떠났다.

나고야에서 그는 잠을 못 자선지 피곤하다며 자주 하던 영상통화나 전화를 전혀 하지 않은 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

2023년 8월

그는 여전히 휴대전화를 내 앞에서 사수했다.​

맥도날드에서 같이 맥모닝을 먹던 어느 주말 아침이었다.​

​​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본 그의 문자 창에는 ‘안주은’이라는 이름이 보였고, 그녀와 쉬지 않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

그녀는 그가 발령받았던 2022년 9월 말, 같은 과로 발령받은 8급에 나이는 10살 가까이 차이나는 여자였다.​

그들이 친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많은 일을 도와줬고 술자리도 자주 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

자리에 앉은 나는 그에게 가볍지만 가볍지는 않은 마음으로 카카오톡 좀 들어가 보라고 했다. 왜일까? 들어간 카톡 대화 목록에는 안주은씨가 없었다. ​

순간 당황한 나는 바로 물어보았다.​

“카카오톡 대화 지워?”​

“아니? 내가 왜?” ​

“근데 왜 아까까지 안주은씨랑 카톡 한 게 없어?” ​

“그건 저번에도 말했잖아. 지역 홍보과 김광해씨가 안주은씨를 좋아하는데 내가 따로 연락하는 거 알면 귀찮아져서 그래.”​

“그렇다고 무슨 본인 대화창을 주말에도 지워? 자기 카카오톡도 남이 볼까 봐 지워가면서 관리 못 할 만큼 그렇게 김광해씨가 오빠 카카오톡을 보면 이상한 거 아니야?”​

“지우는 게 습관 돼서 그래.”​

​​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한 핑계에 더 이상 맞설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고 이런 기분 자체가 처음이었다. ​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 생각을 파고들 만큼 정신이 여유롭지가 않았다.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여주 아웃렛의 주류 매장을 갔는데, 내 남자친구인 이재원은 안주은씨가 사다 달라고 요청한 와인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2023년 9월

갑자기 그가 적극적이 되었다.

내가 퇴근하는 날과 그의 쉬는 날이 겹치면 그는 내 차를 가지고 회사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오곤 했는데, 보통은 그 겹치는 날이 주말이기에 그는 씻지 않고 와서 나를 태우고 바로 집에 가서 밀린 잠을 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언제부터인가 씻고 나온 그가 퇴근하는 나를 데리고 맛집을 찾아가 점심을 먹고, 날 집에 데려다주고는 주말에도 초과근무를 하겠다며 직장으로 가서 밤늦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대게 그가 찾아온 맛집은 칼국숫집이었다. 나는 칼국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저렇게 노력한다는 게 고마우면서도 멀리 나갔다 온 날도 한두 시간만 이라도 초과 근무를 하러 가겠다며 꾸역꾸역 나가는 모습이 이상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 차로 출근을 하는데, ‘왕복 사십분 거리로 출근해서 한두 시간 근무는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또 그 한두 시간을 ‘차라리 나와 쓰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나가는 그는 늦은 밤에 돌아오는 게 다반사였다.

사실 맛집을 찾아가서도 그의 표정은 딱히 신나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그저 무표정이었으며 계속해서 휴대전화만 봤다. 심지어 운전할 때도 휴대전화를 거치대에 놓지 않고 한 손에 들고 하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는 그저 가성비 넘치게 한 끼 식사를 마치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우울하면서도 나를 위해 노력한다는 대단한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

추석에는 우리 엄마 집에 가서 엄마가 일부러 그가 좋아하는 걸 알아서 차려준 죽순 무침과, 한우를 먹은 후, 용돈을 받아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굳은 표정의 재원을 보고, 차 한 잔도 권하지 않고 피곤할 테니 얼른 집에 가라고 하셨다. 그렇게 재원과 나는 이미 30년 공직생활을 마친 엄마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처럼 피곤해하며 밥만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유난히 길었던 추석 연휴라 재원은 연휴 전날까지 대구 본가에 갈지 말지 고민을 하기에 나는 내가 같이 갈테니 대구 본가에 가자고 했다.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함께 대구에 갔다. 본가에 가서 인사를 드렸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아니다.

배송할 물건을 집 앞에 놓고 인증 사진을 찍는 택배 기사처럼, 그의 본가 현관 앞에 내가 사둔 선물과 그의 동생에게 전달할 물건을 두고 쫓기듯 바로 뒤돌아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어머님은 왔으면 둘이 들어와서 밥 먹고 가라 했지만, 그는 이미 거칠게 운전하여 대구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와 나는 대구를 오가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보통의 우리였다면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며, 오가는 세 시간이 부족할 만큼 수다를 떨었으리라.

그저 잠깐, 휴게소에서 바라본 하늘이 예쁘다며 사진을 찍는 내 옆에서 그도 하늘 사진을 찍으며 예쁘다고 한마디 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 사진 한 장으로 후에 나는 또다시 울게 되었다.

3화

갓바위여 나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뉴저지에 사는 친구 희정으로부터 한국에 잠시 들어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희정은 나의 첫 동거 생활을 너무도 궁금해하여 재원에게 동의를 받은 후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자기로 했다. 사실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재원과 내가 사귄 초반부터 함께 수많은 여행을 하고, 식사도 했다.

친구 남편과 함께 넷이서 여행도 다니기도 하여 물어본다는 자체가 겉치레 같은 행위이긴 했다.

나는 이번에 희정과 함께 대구에 있는 팔공산에 꼭 가고 싶었다.

영험한 것으로 유명한 팔공산 갓바위에 가서 유일한 내 소원을 꼭 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대구가 본가인 재원은 나와 함께 팔공산에 가주지 않았다. 아니, 매 주말 ‘초과 근무를 해야 한다’라며 급기야 주말에도 회사에서 멀어지기를 꺼려 하는 걸로 보였다.

내가 팔공산에 가고 싶은 이유는 어떻게 보면 단순했다.

내가 사랑하는 내 남자친구가 건강해지는 것, 그리고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평온하고 행복해지는 것. 그것을 빌기 위해 꼭 가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대구 팔공산 등반 후 대구에서 하루 자고, 주정시로 돌아와 희정과 함께 내가 사는 거리, 자주 가는 카페, 식당 등을 동행하며 이틀을 지낸 후 기차역으로 배웅하기로 했다.

내 계획을 듣던 재원은 경상도를 간 김에 하루 더, 차라리 경주라도 가는 게 어떻겠냐며 숙박을 추가로 예약해 줄 테니 간 김에 경상도 여행을 제대로 하고 오라고 했다. 재원의 의뭉스러운 배려와 함께 그것을 거절하지 못한 나로 인하여 내 동거 생활이 궁금해서 뉴저지에서 서울을 거쳐 일부러 주정시에 오겠다는 친구를 1박 2일 대구 여행을 넘어서 2박 3일 경상도 여행으로 바꿔가며 더 멀리 경주까지 가는 경상도 여행을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상하리만큼 배려하는 그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어쩌면 이제 타인을 집에 재우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미 그는 나에게 정신이 아프고 우울하다고 밝힌 상태이며, 그가 얼마큼이나 아픈지 그의 아픈 수위를 모르는 것이 미안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번 여행은 이박 삼일의 경상도 여행과 일박 이일의 주정시 여행으로 정해졌다.

2023년 10월

희정이 한국에 올 때면 희정 가족과도 함께 만나 여행을 할 만큼 가까운 재원이기에 만날 계획을 짜려고 물어보자 그가 “나도 가야 해?”라는 식의 반응을 했다. 이제껏 없던 반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하다는 재원이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고, 그런 부분에서 희정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고 있었다.

외국 생활을 하며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희정이기 때문에 올해 들어 마음이 아픈 재원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만큼이나 크게 걱정하고 같이 이것저것 알아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에 희정 부부가 한국에 왔을 때, 우리 넷은 제부도 여행에서 맥주 한 잔과 함께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리고 내년에도 웃으면서 만나자고 이야기를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만나기 꺼려 한다.

이제 재원이 나에게 보이는 무표정은 일상이었기 때문에 표정만으로 그의 기분을 판단하기는 어려웠지만, 만나고 싶지 않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전부를 안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이제 그의 표정 하나도 해석하지 못하는 내가 된 것이다.

아니, 이미 온몸으로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지만, 그의 “나는 우울해. 나는 아파”라는 한마디 말로 그는 두껍고 튼튼한 갑옷을 얻은 것이다.

우직한 장군처럼 그 하나만 보는 나를 단번에 충성시키는 갑옷을 입은 것이다.

2023년 10월 8일

드디어 여행 일이 됐다. 그 없이 장거리 운전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나라서 큰 용기가 필요했다.

희정과는 동대구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자고 있는 재원에게 다녀오겠다고 말을 한 후, 대구로 향했다.

간신히 휴게소에 들려 그에게 전화를 하자, 그는 피곤하다고 했다.

그러면 잠을 깨우지 않겠다고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고, 문자메시지만 남기겠다고 한 후, 대구에 도착했다. 그에게서는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희정과의 오랜만의 재회가 서울도 주정도 아닌 둘 다 연고가 없는 대구라서 재밌었다.

우리는 유명한 빵집에서 빵과 커피를 구입한 후, 팔공산으로 향했다.

갓바위에 오르는 것은 평소에 운동을 즐기지 않는 나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기필코 갓바위에 올라가서 소원을 빌겠다는 의지 하나로, 동네 뒷산도 오르지 않는 내가 열심히 올라갔다.

그 마음을 아는지 희정은 끊임없이 나를 응원해 줬다.

올라가서 마주한 갓바위 앞은 장관이었다.

물론 갓바위에서 내려다보는 대구 시내도 절경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갓바위를 향해 앉아 기도를 하는 모습은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자녀의 사진을 꺼내두고 기도하는 사람, 수첩에 써 내려간 글을 읽어가며 기도하는 사람, 108배를 하는 사람, 초에 불을 붙이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염원을 담아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나는 벅차올랐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들이 이 산 위에 모여있다.

세상에 절박한 마음은 나뿐이다 싶었는데, 이렇게나 간절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기도 했다.

나도 얼른 자리를 잡고 기도를 했다.

이전에 말한 것과 같이 내 소망은 세 가지 정도로 추릴 수 있겠지만 갓바위는 소원을 한 개만 들어준다고 누군가 말을 하기에 얼른 한 가지만 빌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른 것은 그 한 가지가 해결되면 따라올 것이기에 그 한 가지 소원을 선택하는 것에는 고민이 들지 않았다.

‘재원 오빠가 건강하게 해주세요. 마음이 건강하고 강해져서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꼭 건강하게 해주세요’

간절히 소원을 빈 우리는 사우나를 마치고 이제 다음날 경주 일정을 위해 일찍 누웠는데 재원으로부터 혼자 있으니 적적하다는 문자메지가 왔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나 보다 싶어, 이번 여행이 더욱더 소중하다고 생각될 즈음 갑자기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다른 내 친구 부부를 만났다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를 넘어서서 같은 라인에 살고 있으니 당연히 만날 수도 있지만 그는 이상하리만큼 격양되어 있었다.

아파트 친구는 일 때문에 잠시 다시 나가야 하지만 남편을 데려다주러 집에 온 길이었고, 재원과 지하주차장 공동현관 출입문에서 딱 마주친 것이다.

“재원씨, 저 나갔다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사다 드릴게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친구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와의 전화를 마쳤다.

이상하다. 내 아파트 친구가 재원에게 일부러 아이스크림을 사다 줄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재원으로부터 또다시 전화가 왔다.

집으로 돌아온 그가 자려고 겉옷을 다 벗고 누웠는데,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갖다 준다고 집 앞에 온 것 같다는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그는 다급하게 ‘잠깐만요’를 외치며 옷을 입는 것처럼 부스럭거리더니 머지않아 친구가 간 것 같아 자기는 자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4화

나만 몰랐던 셋이 하는 연애

2023년 10월 11일

10일 저녁, 주정시에 도착한 나와 희정과 만난 재원은 과음을 했다. 그리고 그 탓에 그는 오전 반가를 신청하고 오후 출근을 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잠을 잔 재원은 충전이 안 된 스마트 워치를 보며, 희정에게 “다인이는 맨날 충전 해준다고 해놓고 까먹고 안 한다?”라며 구시렁 거리며 잠바도 걸치지 않고, 검은색 반팔 폴로셔츠를 입은 채 급히 나갔다.

평소 나와 그는 먼저 일어난 사람이 스마트워치를 충전해 주는데, 하필 내가 먼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충전을 해놓지 않은 것이다.

그를 보낸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은 후 기차역으로 갔다.

하루 더 있고 싶었지만, 다음 날 내가 출근을 해야 하는 관계로 아쉽게 작별을 했다.

그리고 조만간 우리 커플이 서울로 올라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렇게 희정을 보낸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바로 아파트 친구에게 만나자고 하고 그 친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평소 그녀는 나에게만큼은 항상 웃는 얼굴인데 이상하리만큼 굳어 있었다.

첫마디도 재원과 요새 잘 지내냐는 물음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 후, 친구는 아이스크림 사서 올라간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때 재원 오빠가 막 옷 입고 문 열었는데 네가 없었데!”라고 웃으며 대답을 했다.

그러자 친구가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인아, 내가 본 것만 말할게. 말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그냥 내가 본 것만 말할게. 다음은 네가 생각하고 재원씨랑 얘기하든지 해봐”

“나, 재원씨 여자랑 있는 거 봤어. 내가 주차장 공동현관 바로 앞에 주차하고 들어가려는데 네가 있는 거야. 아니 너랑 재원씨랑 있는 거야.

순간 다인이는 대구 갔는데 저 여자는 누구지? 딱 그 생각이 들어서, 창문을 열고 재원씨한테 인사하는데 그 여자가 갑자기 주차된 차 사이로 뛰어갔어.

그런데, 그래. 같은 아파트 사람이면 한 번은 만날 수 있지.

재원씨가 내 남편이랑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갔거든? 그러고 바로 내가 남편한테 줄 게 있어서 다시 급히 왔는데, 그 여자랑 재원씨를 또 만났어.

그리고 그 여자가 또 주차장 쪽으로 뛰어가고.

나는 이걸 너에게 말을 할지 말지 정말 고민 많이 했어. 정말 본 것만 말한 거야.”

그렇게 친구가 말한 것이 10월 11일 오후 다섯시였다.

나는 당황스럽지만 말했다. “네가 아이스크림 사다 줄 때 재원 오빠 집에 있었는데 네가 벨 누르다가 갔다는데?”

“… 가지 않았어. 벨 누르다 말고 사실 그냥 문 앞에 계속 서 있었는데 재원씨가 끝까지 열지도 않았어. 나 정말 그 앞에 오래 있었어, 다인아.

말을 할까 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 그냥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거야. 계속 말하지만 내가 본 것만 말하는 거야.

혹시 추정되는 여자 있니? 그 여자, 갈색 긴 웨이브 머리야. 나 한 번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어. 같이 찍은 사진이라던가,”

나는 다급히 친구의 말을 끊었다.

“말해줘서 고마워. 재원 오빠랑 얘기해 볼게. 나 가볼게.

오늘 일찍 마치고 온다고 했어.”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평생에 제일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몇 달 동안의 불안함과 우울함이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하나 싶으면서도 그의 구청 사람이 잠깐 물건 주러 들렸을 수도 있고, 같은 아파트 주민이 차에 뭘 가지러 갈 수도 있는 거고, 그와 이야기하기 전에는 일단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며 스스로를 진정 시켰다.

걱정하는 친구의 눈을 보며 일부러 더 밝게 인사했다.

차를 타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고, 미친 듯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핸들이 축축해졌다.

2023년 10월 11일 18:00

울면서 운전하는데 재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제 퇴근할 거라며, 어디냐고 묻기에 아파트 친구를 만나고 가는 길이라고 하자, 요즘 자주 만나냐는 질문을 했다.

그렇게 집으로 들어온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희정에게 울면서 전화를 해버렸다.

희정은 우선 진정하고 오빠랑 대화를 해보라고 했다.

네가 14년간 봐온 오빠는 그런 사람 아닌 거 알지 않냐며, 진정하고 오빠랑 대화를 해보라고 했다.

그렇다. 나는 대화를 하면 된다. 아닌 거 아니까 밝히면 된다. 그러면 되는 거다.

집에 도착한 나는 책상에 시계를 풀어놓으려 하다가 재원의 스마트 워치를 봤다.

이제야 충전이 다 된 워치는 주인을 잃은 채 혼자 켜져 있었고 혹시나 싶어 메신저를 켜봤다.

가장 최근의 메시지가 자동으로 켜져 있었다.

무너졌다. 아니 무너질 틈이 없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그가 말하는 내일은 내가 출근을 해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었다. ​

내가 출근하는 날은 재원이 초과근무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하여 항상 내 출근 전날 안이를 엄마 댁에 데려다줬기에 그가 안이를 위해서 할 일도, 집을 위해서 할 일도 물론 나를 위해 할 일도 전혀 없는 것이다.​

​​

어차피 그는 내가 요청하지 않는 이상 분리수거도 음식물 쓰레기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5화

문밖의 그 남자도 함께한 삼자대면

2023년 10월 11일 18:30

우선, 안주은과 통화를 하고 싶었다.

스마트 워치에 저장되어 있는 ‘안주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주은씨죠?”

“네”

“아, 이재원씨랑 바람 나서 섹스하는 안주은씨 맞죠?”

“아? 하하하”

“왜 웃으세요?”

“황당해서요”

그녀가 웃었다. 나는 이성의 끈을 놓고 그녀에게 욕을 했다. 무슨 욕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욕을 했다.

그러자 그녀가 삼자대면을 하자고 했다. 내가 왜 너희 둘을 같이 앉혀놓고 봐야 하냐며 그렇게 만나서 대화하고 싶다면 너만 우리 집에 오라고 했다.

나는 전부터 PC 메신저로 다 보고 있었지만, 내가 사는 집에 내가 없을 때 들어와서 섹스하는 건 아니지 않냐며 다 알고 있으니 오라고 했다.

사실 아는 것도 그들에 대해 가진 정보도 없는 나다. 대답이 없어진 그녀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어차피 삼일 전에 여기서 섹스했잖아요. 오세요.”

그러자 그녀는 주소는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문자메시지로 주소를 보내줬다.

진정할 수 없었다. 아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일단 집 비밀번호를 바꿨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는 집 비밀번호를 변경하여 재원이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거 그거 하나였다.

눈물이 계속 흐르고 어디든 뛰쳐나가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비참함에 아파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이 있어 달라고 나 좀 살려달라고 울면서 얘기했다.

내 속을 알 필요도 알 마음도 없어 보였던 안주은이 웃었었고, 난 그렇게 다른 사람의 남자친구와 그의 여자친구가 동거하는 집에서 섹스를 했음에도 당당한 여자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같이 옆에만 있어 달라고 했다.

쪽팔림도 없었다. 그럴 정신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였다.

아직 안이를 엄마 집에 데려다주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이를 안고 옆에만 있어 달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이미 집에 왔을 시간이지만 재원은 연락도 없고 집에도 오지 않았다.

2023년 10월 11일 20:00

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안주은에게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

더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아침드라마 같은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

​​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재원이었다.​

​​

문을 열자마자 내 얼굴을 본 그는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거 다 아니야. 내가 말할게”라고 했다. ​

나는 그에게 말했다. ​

“너는 이 집에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거 단 하나도 없어.” ​

그러자 그가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다” ​

눈빛이 매서워진 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

그렇게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파트 친구가 나타났다. ​

​​

안도가 된다기보다는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됐는지 또다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황당했다. ​

그 와중에 재원의 목소리를 들은 안이가 꼬리를 흔들며 급히 현관으로 달려왔다. 앞이 안 보이게 되며 소리에 더 민감해진 안이가 어떻게든 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나가려 했다. 나는 발로 안이를 막아섰다. ​

​​

검은색 반팔 폴로셔츠를 입은 그가 양팔을 감싼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침에 나갈 때 그대로다. 그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모든 순간이 슬로 모션이라고 느껴졌다. 현실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

​​

내가 속한 이 상황이 몇 해 전에 갔던 개그콘서트 무대의 한 장면이라고 느껴졌다. 믿을 수 없었다. ​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에게 친구는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토닥여줬다. ​

​​

안이는 형과 자기 사이를 막는 나 때문에 당황했는지 현관에 오줌을 지렸다. 친구는 급히 그것을 닦았다. ​

​​

갑자기 공동현관 벨이 울렸다. 안주은이었다. ​

공동현관을 열어줬다. ​

이틀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안주은은 공동현관 앞에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

나는 나가서 문을 열었다. ​

​​

갈색 긴 머리에 웨이브를 한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다. ​

​​

또다시 미칠 것 같았다. 뛰어내리고 싶었다. ​

고층이라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기절하겠다 싶었다. ​

아니 그러면서도 ‘내가 왜 죽어? 이야기나 들어보자’싶었다. ​

​​

그 짧은 시간 안에 내 눈앞에 펼쳐진 건 아주 썩어빠진 코메디쇼였다. ​

​​

그리고 아무 말도 못 하는 내 옆에서 아파트 친구가 말했다. ​

​​

“아, 이틀 전에 봤던 분이시네요. 우리 두 번째 보죠? 아니다 세 번째다”​

​​

안주은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에게 거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희정이 온다고 하여 새로 샀던 토퍼 위에 그녀가 서 있었다.​

나는 엄청난 대접을 하는 양 그녀에게 바닥은 차가우니 토퍼 위에 앉으라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그 토퍼 위에 앉았다. 그러자 안이가 그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

​​

나는 몇 번이나 무너진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또다시 무너졌다. ​

​​

평소 안이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데다가 앞이 안 보이기 시작하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

그런 우리 집 대표 소심쟁이 강아지가 그녀의 옆에 엉덩이를 찰싹 붙이고 앉았다. ​

​​

또한,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내가 떠올라서 내 집 침대에선 섹스를 하지 않고 내가 새로 산 그 토퍼 위에서 섹스를 했다고 했다.​

​​

눈물이 앞을 가렸다. ​

아무것도 할 수도, 아무 말도 할 수도 없었다. ​

​​

삼자대면을 하자던 그녀에게 호기롭게 네가 섹스한 내 집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사실 안이를 혼자 두고 나갈 수 없어서 집으로 불렀던 것이었기에 너무나 미칠 것 같았다. ​

소심한 내가 내 집으로 이 여자를 불렀다는 사실이 믿지 않았다. 사랑과 전쟁에서조차 너무 흔하여 인기는 없지만 항상 있는 에피소드를 보는 기분이었다. ​

​​

아파트 친구는 그녀에게 물을 가져다준 후, 안이를 데리고 침실 방으로 갔다. ​

​​

나는 안주은에게 이재원과 사귀냐고 물어봤다. ​

그녀는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더 황당했다. 그런 게 아니면 뭐냐고 했더니 그런 게 아니라고 또다시 말했다. ​

분홍색 토퍼에 앉아있는 분홍색 셔츠를 입은 갈색 긴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자꾸 나에게 아니라고 하고 있었다.​

​​

나는 잠시 다른 세계로 떠났다. ​

​​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

​​

꽃밭이었다. 나는 그냥 햇볕을 쬐고 꽃향기가 맡고 싶은데 자꾸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빨리 와서 이 아침드라마를 보라고 유치해 죽겠다고 여자가 말도 안 되는 답답이인데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누군가가 나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

​​

안주은이 하는 말은 황당했다. ​

내가 이렇게 울면서 자신을 만나자고 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는 남자친구가 그래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 ​

나는 ‘내가 보자고 한 게 아니고 네가 삼자대면하자고 했잖아’라고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그 와중에 현관 비밀번호가 바뀌어서 들어오지 못하는 재원은 끊임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

초인종 음량을 줄였다. ​

​​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호위 무사인가 보다. ​

나에게는 알았다고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더니, 안주은이 들어온 순간부터 끊임없이 벨을 누르고 문을 열라고 무언의 압박을 한다. 웃기지도 않는다. 아니 웃기다.

6화

구청에서 사랑받는 그녀의 대화

그녀는 내 남자친구에 대해 그저 섹스만 하는 사이라고 했다. 내가 뭘 들은거지?

나는 그녀에게 너와 이재원이 한 메신저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만 건들지 않는 조건으로 이재원과의 메신저를 보여주기로 했다.

이재원만 건드는 거면 상관없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 너를 구하겠다고 이 순간에도 집에 들어오려고 미친 듯이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 이재원이 모지리 같 다고 느껴졌다.

나도 너희가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다고 동의했다.

그녀가 검정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는데 핸드폰 배경화면이 켜졌다. 그 켜진 배경화면을 멍하게 보던 나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연두색 테니스 공이 여러 개 있는 굉장히 밝은 그림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발랄한 테니스 공들이 ‘자, 너는 이번에도 나를 뚫고 들어가야 해. 해볼 수 있어?’라며 말을 걸고 있었다.

이번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각자 연인이 있는 커플이 점심시간마다 같이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마다 티타임을 갖고,

키도 비슷한데 가끔은 복도에서 정수리 냄새를 맡고,

퇴근 후에는 함께 술을 마시고,

주말에는 맞춰서 출근을 하며,

가끔은 내 차를 타고 둘만 구청을 빠져나가며,

같은 핸드폰 배경화면을 하고 있다.

누가 봐도 얘네가 무슨 사인지 알겠다 싶어,

사실은 추정되지만 일 키우기 싫어서 다들 모르는 척한다는 생각이 들자 이 둘이 너무 우습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파헤치려는 나는 더욱더 우습게 느껴졌다.

그렇게 보게 된 메신저 속에는 내가 알고 있던 이재원이라는 남자는 없었다.

나와는 하지 않는 말투, 너무 대화가 많아 나는 일상 대화는 제쳐두기 위해 ‘팬티’라는 키워드로 아예 검색을 하여 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너무 많았다.

본업이 뭘까. ​

수많은 대화 속에 자주 언급되는 ‘본업’이라는 글자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재원이 나와 같이 헬스장에서 운동한 날을 본업이랑 같이 하는 중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

위 문자에서 말하는 ‘내일은 하체하는 날’. ​

그 내일은 내가 또다시 출근해서 집에 없는 날이었고, ​

그 말은 문맥상 섹스를 말하는 거겠지. 어이가 없었다.​

이런 문자들이 날마다 수십 번을 오갔다.​

​​

그녀는 나의 존재를 알았다. ​

​​

‘다인이랑도 해. 본업이랑도 해.’ 뻔뻔했다.​

그렇다 본업은 이재원의 여자친구이자, 이다인인 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이없는 대화들이 계속해서 내 눈앞에 펼쳐졌다.​

​​

믿을 수가 없었다. ​

​​

대화를 과거로 올라갈수록 다급해진 그녀는 그냥 물어보면 내용을 다 알려줄 테니 휴대전화를 돌려 달라고 했다. ​

나는 싫다고 더 보겠다고 했다.​

​​

그 와중에 구청에서 인기가 많다던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을 언급하며 이재원의 질투를 유발하고 있었다. ​

​​

내가 다 기억도 할 수 없는 남자들의 별명이 스쳐갔고, 그녀는 계속해서 그에게 도발했다.​

그러면 내 남자친구인 이재원은 거기에 맞춰서 미친 듯이 질투를 했다.

이재원은 계속해서 10층은 나랑만 하자고 했다. ​

10층이 뭐냐고 했더니 자취를 하던 그녀의 집이 10층이라고 했다. 황당해 죽을 것 같았다.​

​​

신나 보였다. ​

​​

남자친구 있다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의 섹스를 즐기며, 직장 내 또 다른 남자들의 데이트 요청을 자랑하고 있었다. ​

그녀는 구청에서 아주 예쁨을 받고 일 잘하는 인싸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온 나로서는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

나는 도대체 내 집에서 이 여자와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차라리 안 볼 걸 싶을 정도로 대화는 처참했다.​

​​

네이트판 등에서 나오는 불륜 글 속, 카카오톡 캡본은 우스웠다. 그 정도였다.​

​​

참, 재원은 내 차를 회사에 자기 차라고 말하고 다녔는지, ​

종종 인재개발원에서 만난 동기들, 아니면 지방직 스터디그룹의 다른 구청 동기들을 내 차로 태우기도 했었다. ​

그건 괜찮았다. 그와 내가 물건을 네 거, 내 거 나누고 쓰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고, 자동차 보험도 그가 사용이 가능하도록 차를 구입한 순간부터 매해 들었을 정도기 때문이다. ​

​​

한번은 지방직 스터디 내 동구청 동기란 여자가 10월 동네 축제에서 나와 이재원 목격담을 단체 대화방에 말하며 ‘년이랑 왔나 놈이랑 왔나 확인했는데 년이라 왔네’라고 표현하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 여자는 실제로 나에게 “행복하세요”라며 밝게 인사했다. 카카오톡으로는 그따위로 동료의 연인을 저질스럽게 말해도 내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했기 때문에 그딴 저질스러운 말투의 그녀도 내 차에 한번 쯤 태운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

그런데 이재원은 내가 차를 쓰지 않는 날은 초과근무하는 척 차를 가지고 나가서 그녀와 내 차로 데이트를 했다. ​

국수도 먹으러 가고, 바람도 쐬러 가고. 그렇게 수도 없이 쌓인 안주은과 이재원의 대화를 보는 것은 생각보다 역겨운 일이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주유라고 표현해서 주유가 뭐냐고 묻던 나는 이벤트 주유에서 어느 순간 그 뜻을 알고 말았다. ​

내가 눈치가 너무 없는 것이었다.​

​​

그들이 말하는 주유는 차에 기름을 넣는 것이 아닌 남자가 섹스 중 한다는 사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

역겨웠다. 그 뜻을 이해하는 내가 역겨웠다. ​

​​

이재원이 안주은과의 섹스 중 하는 사정이 주유였던 것이다.​

이벤트 주유는 ’뒤로 하는 것‘이라는 부연 설명도 함께 했다.​

​​

주유와 함께 그들의 대화 속에는 ‘지원’,‘지이’가 계속 언급됐는데, 그건 그들의 쌍둥이 이름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

진짜 어이가 없었다. ​

​​

그러면서 계속 2월을 언급하고 이태리를 언급하기에 물어보자 안주은은 내년 초에 결혼 예정이며 이태리로 신혼 여행 예정이라고 했다. ​

​​

어느 순간 눈물을 보인 그녀는 남자친구한테만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너는 그럼 이재원과 업무 아닌 그 이상은 어떤 것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7화

일방통행

서로 사랑한다는 표현도 하고 있었다. 맥락상 안주은도 이재원에게 이미 사랑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 나에게는 서로 섹스만 했을 뿐이라는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했다. ​ ​​ 또한, 그렇게 포기 못했던 나고야 여행은 그녀와 갔던 것이다. ​ 내가 이재원의 짐까지 챙겨 구청 주차장에서 한 시간 반을 기다려 데려다준 그 나고야 여행을 안주은과 함께 갔던 것이다.​ ​​ 더 볼 것도 없고 볼 수도 없었다. 그들의 대화는 나고야를 기점으로 한 번 삭제를 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긴 시간 대화를 했으며, 그녀의 결론은 이재원이 망하든 말든 관심없고, 어떻게 하든 상관없지만 자기 남자친구한테는 이 사실을 절대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같은 사무실 동료로서 일하는 것을 제외한 어떤 것도 이재원과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었다. ​

​​

그런 그녀가 나에게는 왜 당당하게 삼자대면을 하자고 했는지, 그 삼자대면에 왜 자신의 남자친구는 없는지. ​

병신 같은 이재원이 역시나 자길 감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

​​

그렇게 그는 안주은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

내 남자친구가 섹스 파트너를 데리고 우리의 집을 나갔다. ​

​​

나는 내 집이 갑자기 숨이 막혔다. 바람을 쐬고 싶었다. ​

날 걱정하는 친구에게 안이를 잠시만 두고 산책을 다녀오자고 했다. ​

​​

그렇게 나온 아파트 입구에 이재원과 안주은이 서있었다. ​

그녀는 당당했던 모습과는 달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내가 다가가자 갑자기 그가 나에게 소리쳤다.​

​​

“못됐다, 정말. 그냥 보내주지” ​

​​

나는 이제는 황당하고 눈물도 말라 나오지도 않았다. ​

아직도 검은색 반팔 셔츠만 입은 그 남자를 보며 말했다. ​

​​

“네가 지금 나한테 못됐다고 말한 거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라고 흥분하여 소리치자 그가 대답으로 한 말은 나를 죽이고 말았다.​

​​

“너랑 나랑 한 거 연애야 아무것도 아니야 문제 될 거 없어.”​

​​

​​ 그리고 몇 시간 후, 그에게 마지막에 그렇게 해서 미안하다며 행복하길 바란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

​​

내가 잘 살길 바란다면 너는 그랬으면 안 됐다. ​

너도 안주은도 인간으로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

14년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끝이나 버렸다.​

아니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본업과 주유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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