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업과 주유 전편 사말사 8~14화

본업과 주유 전편 사말사 8~14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단체, 사건 등은 사실과 무관하며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프롤로그

주유의 사전적 의미 :

1. 명사 자동차 따위에 기름을 넣음

2. 명사 기계나 기구의 마찰 부분에 기름을 침

본업의 사전적 의미 :

1. 명사 주가 되는 직업

14년 사귄 내 남자친구와

그의 파트너의 대화를 발견한 이야기

그리고 알게 된 본업과 주유의 의미

사말사 (些末事)

: 자질구레하여 중요하지 아니한 일

1화~7화

8화

충동의 줄다리기

그날 이후, 나는 죽고 싶은 충동과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충동 사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못된 놈 년을 생각하면, 내가 잘 살아야 하는 데 힘이 나질 않았다.​

​​

도저히 안이를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나는 엄마와 동생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먼 지역에 사는 동생이 연차를 내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

엄마와 동생을 마주한 나는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말았다. ​

​​

무엇보다 친아들처럼 집에 이재원을 받아주고, 서류 상만 5년이지 이미 2017년부터 엄마 집에서 데릴사위처럼 먹이고 재워준 엄마를 마주하는 게 큰 고통이었다. ​

엄마는 나에게 울고 싶은 만큼 울라고 하셨다. 동생은 그 새끼를 죽이겠다고 했다. 동생도 종종 이재원을 스터디 카페에 태워주고 음료를 사다줄 만큼 친한 사이였다.​

​​

나는 평소에 먹는 것을 좋아하고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인데 그런 내가 물조차도 넘어가지 않고 배고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

​​

이러다간 내가 죽겠다 싶어 일전에 이재원을 위해 찾아둔 정신과에 갔다. 뇌파 검사 및 상담을 진행하고 안정제와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

의사 선생님은 나보고 내가 살고 있는 구에도 상담 센터가 있으니, 충동이 들면 꼭 상담을 받고 추가로 불안약을 줄 테니 힘들면 꼭 불안약을 먹으라고 하셨다.​

​​

10월 17일

​​

눈이 흐릿하고 잘 안 보이고 구역질을 하는 날이 계속됐다. 물만 넘기려 해도 속이 울렁거려 토가 넘어왔다. ​

동생과 엄마가 동행하여 안과에서 정밀 검진을 받고 집에 오는 길에 엄마가 갑자기 장어가 꼭 먹고 싶으니 장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

​​

나는 정말 힘들고 잠만 자고 싶은데 이 와중에도 엄마는 장어를 꼭 먹어야 하나 속으로 푸념하며 따라갔다. ​

양념 장어와 소금 장어를 시켰는데 연거푸 탄산음료만 들이키고 있던 나에게 엄마가 “한 개 먹어봐”라고 하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양념 장어를 한 개 집어먹었고,​

엄마가 나지막이 “아이고 먹었네 먹었어”라고 하셨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엄마는 내가 뭐라도 먹었으면 하셔서 일부러 장엇집을 가자고 우기신 거였다. ​

못난 딸은 그것도 눈치 못 채고 이 와중에도 엄마는 장어를 먹고 싶어 하시네라고 했던 것이었다.

하나를 더 먹어볼까 하는데 카카오톡에 알림이 울렸다. 이재원이었다. 더 이상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

그리고 나는 집에 와서 모든 것을 게워냈다.​

​​

그는 만나자고 했다. 우리 엄마 집에서 살았던 비용에 대해 얘기를 하자고 했다. ​

​​

10월 20일

​​

그렇게 만난 그는 며칠전과는 다르게 검정색 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

그는 다 미안하다며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했다. 바람피운 모든 사람들이 한다는 핑계를 토시 하나 빼지 않고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고 누군가 나를 속이려고 몰래카메라를 찍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

그는 모든 건 그의 잘못이고 실수였고, 내 옆에서 평생 반성하며 그렇게 살겠다고 했다. 한 번만 다시 기회를 달라고 했다. ​

​​

그는 그동안 찜질방에서 자거나, 가끔 몸이 정말 안 좋을 때는 동료들에게 부탁하여 봉명동이든 둔산이든 동료들 집에서 잤다고 했다.​

​​

무릎이 많이 안 좋아졌다는 그는 목소리도 많이 안 좋아 보였다. 그러면서 지방직 스터디를 함께했던 조원의 강아지가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했다.​

동료의 강아지는 저녁 산책을 마치고 집에 와서 갑자기 죽었다고 했다. 심지어 오늘 화장을 하는 날인데 그녀는 연가가 남지 않아 갈 수 없다는 말도 전했다.​

​​

그 말을 들은 나는 혼란스러웠다. 가족 중에 안이는 이재원을 가장 사랑했다. 아니 누가 봐도 일등으로 좋아한다. 그런 안이와 재원을 내가 힘들다고, 내가​ 화난다고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단 사실이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안이는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갈 때마다 길게 살지 못할 거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

급하게 안이와 재원을 만나게 해줬다. ​

​​

꼬리치며 그에게 안기려고 발버둥 치는 안이를 보니 내가 못할 짓을 한 것만 같아 모든 것이 내 이기심인 것 같아 죄스러워졌다. ​

나에게 남은 작은 인내심으로 이재원이 집을 구할 동안 그녀와 했던 나의 집에서 이재원이 안이와 함께 지내도록 허락했다.​

​​

그게 나의 가장 큰 실수였다.

9화

내 최대 관심사

​​그에게는 공동현관 비밀번호도, 현관 비밀번호도 공유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정한 날에 카드 키를 주어 그가 안이와 함께 잘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그는 이전에는 초과근무하느라 힘들다는 핑계로 며칠째 거르던 안이와의 산책도 성실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

이러한 시간을 갖자, 그는 내가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나를 파트너와 함께 본업이라 표현하고, ​

처음 집에 놀러 오는 친구를 위해 새로 산 토퍼 위에서 를 하고, ​

짧은 내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으로 인해 머리카락은 잘 치웠냐고 서로 장난을 치고, ​

내 차를 타고 바람을 쐬고 맛집을 가고, ​

온갖 체위를 말하며 열 개 중 몇 번째 이벤트를 할지 대화로 시시덕거리는 그를,​

​​

곧 미국 출장을 가는 그녀의 남자친구 대신에 그녀의 10층 자취방에 켄트 칫솔을 갖다 놓겠다던 그를, ​

​​

인재개발원 친구들과 술 마셨다며, 나에게 일사천리라 불리던 1조 친구들을 판 후, ​

심지어 술 마시면 집중해야 하니까 연락을 하지 말라고 한 그를,​

​​

감히 내가 용서했다고 생각을 하다니.​

나는 특히 그 일조 친구들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일주일에 두세 번씩 그것도 새벽 세, 네시까지 술을 먹는다는 게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세종에 사는 사람도 있었다.​

알고 봤더니 그녀의 집에서 동죽을 시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애니메이션을 함께 보며, 주에 못해도 두 번 이상, 새벽 세시까지 를 하고 기어들어와 피곤하다고 코를 골고 자던 그를 내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문득 나는 그의 휴대폰이 궁금해졌다.​

나에게 잘못을 빌며, 내 페이스 아이디도 다시 등록하고 폰 배경화면도 바꾼 그 휴대폰이 궁금했다. ​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안 궁금해하는 나에게 언제든 봐도 된다고. 자신은 이제 아무것도 숨기는 게 없다고 몇 번이고 말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열어본 카카오톡 창은 깨끗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문자메시지 창이 궁금했다.​

안주은과의 대화 목록이 있길래 누르려고 보니 삭제된 메시지가 200개가 넘었고 살리겠냐는 팝업 창이 떴다. ​

메시지를 살려 봤다.

어이없게도 그들은 그날 이후로도 끊이지 않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

그들은 웨딩촬영 일정을 얘기하며 놀러 오라고 했다.​

그리고 대화에서 알게 된 사실은 그는 나와의 연애 기간을 7년이라고 줄여서 말하고 다녔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누군가의 술자리를 언급하며 이재원의 질투를 즐기고 있었다.​

​​

얼마나 재밌었을까. ​

​​

자신이 비록 모르는 여자에게 울면서 빌었지만 자신의 안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자신은 그저 평소처럼 술 먹고, 노래방 가고 놀면 된다.

알고 봤더니 이재원은 그날 이후로도 내가 안 재워주는 날은 종종 안주은의 집에서 자 왔었다.​

나에게는 잘못을 빌며, 잠은 안주은네서 잔 것이다.​

​​

그 시간에 바로 이재원의 폰으로 안주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바로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여?”​

“주은 씨.”​

“…네”​

“어디세요?”​

“노래방이요..”​

“제가 이재원이랑 다시 만나고 연락하지 말랬죠. 제가 말한 거 그거 하나죠.”​

“…”​

“대답해 봐요 주은씨. 제가 주은씨한테 뭐 잘못했나요? 잘 지키지 않았나요? 나에게 왜 이래요?”​

“… 죄송해요.. 진짜 아니에요..”​

“주은씨 이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

주은이의 최대 관심사는 재원이가 비밀번호를 뚫고 집에 안착했냐였다.​

왜일까, 안착을 안 하면 자기 집에 가서 피자도 같이 시켜 먹고 주술 회전도 보고 나한테는 안 본척하고​

무빙도 볼 수 있는데.. 어쩐지 나랑 무빙 볼 때 처자더라..​

​​

말도 안되는 일을 겪으면서 나는 많이 아주 많이 약해졌고, 정신과 약의 힘을 빌려 살면서도,​

상담을 거듭하면서도 항상 충동과 우울감으로 미칠지경이었는데 어째선지 이번만큼은 제정신이 돌아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10화

어른이 된다는 것

그날 밤, 나는 숨 막히는 고통에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

그리고 또다시 이재원은 반가까지 내며, 다시는 절대 연락하지 않겠다고 무릎을 꿇고 끊임없이 빌었다. ​

자신이 안주은과 나 모르게 삭제까지 해가며, 카카오톡이 아닌 메시지로 연락한 이유는 안주은과 자신은 서로가 서로의 ‘본업’과 잘 되어야지만 망하지 않는 한배를 탔기 때문에 서로를 응원해야 하는 입장이라 연락을 계속했다고 했다.​

혼미한 날이 계속됐다.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넘어가던 밥도 다시 넘어가지 않았고, 기존에 처방받은 수면제는 통하지 않을 만큼 불면증에 시달렸다. ​

​​

누군가 내 머릿속에 팝핑 캔디를 끊임없이 터뜨리는 것만 같이 모든 순간이 어지러웠다.​

오일만에 다시 찾은 정신과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회피하지 말고 조금씩 날 힘들게 한 사건을 직시해 보라고 했다.​

자꾸 깊은 늪으로 가라앉은 내가, 스스로 너무 힘겨워 선생님께 말했다.​

​​

감기에 걸리면 내과에 가서 감기약을 처방받고, 약을 먹으면 점차 낫는데, 왜 내 머리는 이렇게 갈수록 더 어지러워지냐고 제발 낫게 해달라고 울고 말았다.​

약을 처방받고, 병원 건물의 CU 편의점을 지나가다 음식도 못 넘기는 내가 서러워 그냥 무작정 들어가서 눈앞에 보이는 참깨 라면을 집어 들었다. ​

뜨거운 물을 붓고, 몇 분을 기다리다 한 젓가락을 먹으려는데 넘어가지 않았다. ​

창밖으로 비추는 따듯한 햇살이 내 마음을 더 갈기갈기 찢어놓는 기분이었다.​

눈앞에 내 약봉지가 보였다. 가만히 밖을 쳐다봤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

사람이 이 지경으로 고장 날 수 있을까. ​

멀쩡해 보이면 뭐할까.​

머릿속이 이렇게 다 박살이 나 있는데. ​

남들 다 하는 연애고, 남들 다 하는 사랑이고, 남들 다 겪는 이별인데, ​

나는 왜 이 흔한 걸 흔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그걸 못 견뎌서 이렇게 고장이 나 버린 걸까.​

원망스러웠다.​

그 남자를 선택한 순간도, ​

그 연애를 시작한 순간도,​

심지어는 그날 내가 그 문자메시지를 발견한 것도.​

아파트 친구가 그 둘을 목격한 것도 모든 것이 다 후회가 됐다.​

모든 기억과 순간 그리고 추억들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그 새끼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창밖을 보던 나는 결혼을 한다던 안주은이 생각났다.​

​​

내 집에서 를 한 삼일 후, 상견례를 마치고, 내가 이재원과 육 년 이상을 함께 산책하던 동춘당에서 웨딩촬영도 했으며, 그 촬영장에 이재원을 놀러 오라고 했던 안주은이 생각났다.​

그리고 삼자 대면에서 제외가 되었던 상대 남자가 생각 났다. ​

고장 나도 나처럼 뒤늦게 고장 날 그 남자가 갑자기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질감이 느껴졌다. ​

그 와중에도 노래방을 가고, 술을 먹고 이재원을 비롯한 구청 안팎의 다른 남자들, 유부남한테 오는 연락마저 자랑해대는 안주은이 너무나 징그럽고 미웠다.​

​​

이재원과의 연락을 하지 말아달라는 나의 유일한 부탁을 무시하고, ​그 이후로도 한 집에서 잤으며 그리고 또 결혼 준비는 그 남자와 함께 시기에 맞춰서 성실히 수행하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

안주은은 지키지 않는 약속을 지키겠다며 약을 먹고 구역질과 하혈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병신같다고 느껴졌다.​

​​

그래서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해 안주은의 엄마와 이재원은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나에게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라고 말을 하게 된다.​

어른스러운 건 뭘까.

11화

11월. 열 두개의 달 중 열한 번째 달

문득 그가 했던 말들이 내 현재를 날카롭게 찌르고 지나간다.

“여자 만나려면 공무원 하면 돼.”

“결혼 못 한다는 말은 공무원 세계에선 아니야. 언제라도 결혼할 수 있어. 구청 여자 남자 비율 좀 봐.

너도 나 가끔 데리러 왔을 때 보면 남직원 하나에 여직원 셋씩 다니고 그러잖아. ”

2023년 11월

안주은의 남자친구에게 대략적인 사실을 털어놨다. 그는 내가 상황을 말하자마자 상대 남자의 이름을 물어봤었다.

이재원이란 나의 대답에 “아, 재원이.”라고 했다.

내가 평소 그들이 친한 것을 알았듯이 그도 이미 이재원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리라.​

재원아.

주은아.​

니네는 그 짓거리를 하며 상상이라도 했니.

11월에는 서로를 정리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던 너희들의 본업끼리만, 그 11월에 허무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게 될거란 걸 말이야.

그 여자의 남자 친구를 보자, 그 놈 년들 식으로 말하면 안주은의 본업을 보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과분한 사람이 그 여자의 곁에서 그녀를 믿고 긴 시간 동안 지켜줬구나 싶었다.

내가 싸우고 발버둥 치던, 어쩌면 그보다 더한 벼락을 그에게 내리꽂은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 들어 손에 쥐고 있던 항불안제를 계속해서 털어 넣었다.

어쩌면 내가 느낀 고통보다 더 한 고통을 선사한 나에게 그는 말해줘서 고맙다며 오히려 내 걱정을 해줬다.

나는 이 사람에게 귀인일까. 죄인일까.

누군가의 말마따나 더 한 지옥을 겪기 전에 벗어나게 해준 귀인일까? 아니다.

언제라도 알 수 있었고, 알아차렸을 사실을 단계도 없이 최악으로 선사한 나는 그 사람에게는 그저 죄인일 뿐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안주은의 엄마와 통화를 하게 됐다. 나와 만나고 싶다는 걸 거절하자 전화를 원했다.

그 여자 엄마의 첫 마디는 “다음 계획이 뭐예요?”였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어머님이 미안하다 죄송하다가 아닌 제 다음 계획이 뭐냐고 하셨어요?”

그 여자의 엄마는 “혹시 피켓 시위라도 할 생각이에요? 구청 앞에서?”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흥분과 함께 소리쳤다.

“어머님 지금 어머님이 제 계획이 뭐냐고 물으셨어요? 제 계획은 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약 안 먹고 잘 사는 겁니다.”

그러자 그 여자의 엄마는 왜 이렇게 흥분을 하냐며, 이게 흥분할 일이냐며, 내 딸이 유부남이라도 만났냐고 우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결혼한 사이는 아니었고,,”라고 상황을 설명하려다 문득 깨달아 이어서 말을 했다.

“아, 법적으로 문제 될게 없는데 저 혼자 왜 이렇게 흥분하냐는 말이 하고 싶으세요? 왜요? 구청 앞에서 피켓 시위해드려요? 원하시면 해드릴게요. 계획엔 없었는데 그렇게 원하시면 해드릴게요.”

그러자 그 여자의 엄마는 “마음대로 하세요!!! 피켓 시위도 하세요!!!! 내 딸이 사과해야 할 대상은 당신이 아니에요. 아니, 성인이면 성인답게 자기들끼리 해결할 문제를 왜 이렇게 만들어요? 한 두해 사귄 것도 아니라면서? 그리고 왜 내 딸은 가두고 강제로 핸드폰을 뺏어요?”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사실 확인하시고 전화하시는 거요? 어머님 딸이 한 짓 아시면 저한테 이렇게 못하세요. 다시는 이렇게 못하십니다. 후회하실 거예요. 본인 딸이 삼자대면하자고 저한테 웃으면서 얘기했고. 본인 딸이 제 전 남자친구만 건들라면서 저한테 직접 메시지 보여줬습니다. 알고 전화하신건가요?”

그러자 사실 확인을 하겠다고 새침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선 그 여자의 엄마와 전화를 하는 일도, 만나는 일도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의 모든 날은 또다시 충동의 연속이었다.

약을 먹어도 매일 같이 큰 바위에 깔리는 악몽에 시달리며 울면서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10월 11일에 집 주소를 알려주느라 문자메시지를 보냈던 그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주은이다.

12화

심심한 사과의 말

11월 13일

안주은은 나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내 시간에 맞추겠으며 어디라도 날 만나러 오겠다고 제발 만나 달라고 했다. ​

연락이 온 그날 바로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약속시간보다 먼저 카페에 가있었다.​

안주은은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타났다. 그러고는 나에게 꼭 진심으로 만나서 사과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 ​

어이가 없었다. ​

​​

왜 그 진심은 내가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말을 하고 나서야, ​

자신의 엄마에게 구청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한다고 하고 나서야, ​

나온 것일까.​

10월 11일에 나는 내 바닥까지 까뒤집어서 안주은에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이 여자는 자기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이재원. ​

그놈 손바닥 안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던 건지, 잘만 먹고살다가 왜 병가까지 내며 나에게 하필 지금 사과를 하러 온 것인지.​

갑자기 울면서 사과하는 안주은을 보고 있자니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

​​

그리고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지난 한 달이 눈 앞에 지나갔다.​

처음부터 ‘사’자 대면을 하자고 이들에게 얘기했으면, 이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주유를 한다느니, ​

10층만 해달라느니,​

알 수 없던 말들로 가득했던 메시지 내용을 들고,​

구청 앞으로 가서 캡 모자에 마스크를 끼고 피켓 시위를 했으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

아, 그렇다면 이들은 나에게 사과를 할 일도, 머리를 숙일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비참했다.​

안주은은 나에게 처음 사과했을 때부터 모든 말에 거짓이 섞여 있었다.​

한꺼번에 ‘지원이와 지이’ 쌍둥이를 성공하겠다고 하던 이재원에게 그건 주사님 ‘꼬치’에 달려있다고 대답하던 안주은은,​

​​​

9월에 처음 만났다고,​

그다음에는 7월 14일에 나고야에 안 갔다고,​

​​​

마지막에는 내 집에서 는 안 하고 애니메이션만 봤다고 한 그 입으로 갑자기 왜 사과를 하는 것일까.​​

​​

나에게 걸렸던 그날 이후에도 나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가슴을 치며, 최대한 인간다운 이별을 하겠다며 입 닥치고 속으로 삭히고 있던 것인데 ​

​​

카카오톡은 들킬까 봐 문자메시지로 이재원에게 먼저 다시 연락을 하고,​ 그 후로도 시간을 맞춰서 초과근무를 찍고,​ 밀레니얼 보드라던가 모임 발표를 준비하며, 회식 장소는 안주은이 선택한 소고기 집으로 하고,​ 찜질방에서 자는 이재원을 자기 집으로 들어오게 한 그녀가 왜 지금 나에게 진심이라며 사과하는 것일까.​

​​​

2022년 9월 29일 자로 발령을 받아 포털 사이트에 둘의 이름 여섯 글자만 검색해도 지역 뉴스에 같이 뜨는 이들이,​ 처음 를 했다고 들킨 2023년 6월 6일부터 다섯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본인 말하는 대로 하면 본인의 본업한테 내가 연락을 하고 나서야, ​

​​​

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일까?​

나는 안주은에게 너의 말은 못 믿겠고, 나는 80살이 되어도 너를 향해 욕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마음 풀리시는 대로 다 하시라며 카페 테이블에 머리를 숙이던 안주은은 ‘그 남자’는 어떤 식으로 반성할지 모르지만 자기는 꼭 자기 몫의 죗값을 치르며 살겠다고 했다.​

​​

날 지칭하는 ‘본업’이라는 별명도 본인이 만들어놓고, 그 본업인 나에게 갑자기 나타나서 사과를 받으라고 고개를 숙인다.​

떠서 입에 쑤셔 넣는 그 사과를 듣던 나는 구청 직원들이 정말 몰랐을 것 같냐고 물어봤다. 안주은은 고개를 숙였다.​

​​​

“사람들이 재네 둘만 나간다 어? 우리 보고 말한다 어? 우리 본다, 봐!”라고 하며 ​

구청 주차장, 내 차에서 시시덕거리던 영상이 다 찍혀있는 블랙박스를 뒤늦게 본 나도 너무나 황당했다.​

​​

한두 번 찍힌 게 아닌 그 영상들을 보며, 나는 얼마나 이 둘이 구청 사람들을 우습게 봤는지.​

너네 엄마 말대로 하면 ‘한 두해’ 근무한 사람들도 아닌, 10년 넘게 한 청에서 일하는 중인 사람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너네 같은 인간들을 모를 줄 아는지.​

​​​

사실은 관심도 없고,​

귀찮아서 모르는 척하고,​

건들면 일 커지니까 내버려 두고 있는 건데,​

​​

그 사회생활 경험이 무섭지 않을 만큼 서로의 몸이 대단했던 건지.​​

​​

우스웠다.​

괴로웠다.​

​​​

마지막으로 나는 안주은에게 다시는 이따위로 살지 말라고, 나는 계속해서 너를 욕할 거라며 자리를 파하자고 했다.

13화

해우소(解憂所​)

이재원은 나에게 비는 그 삼주의 시간 동안, 내 화가 풀린다면 자신의 잘못을 회사든, 상사든, 친구한테든 말해도 되고, 자신이 직접 말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

​​

내 마음만 풀어질 수 있다면 인재개발원에서 만난 1조 단체 대화방이든, 지방직 스터디 대화방이든 원하는 누구한테든 말해도 된다고 했다.​

​​

그랬던 그가,​

어느 날 무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회사에 소문이 다 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

​​

주차행정과 주차 기획 팀장이라든지, 모든 과 사람들이 알면서 모르는 척했던 것 같고, 매일같이 메신저로 대화하던 동료 중 몇몇은 눈빛부터 차가워졌으며, 과 사람 중 한 명은 주사님 요새 괜찮냐는 질문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 사회적 매장을 당했으며, 자신의 잘못에 대한 죗값을 다 치른 것 같다고 했다.​

이재원의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개인 사이의 문제로 사회적 매장을 시킨 이 상황, 그 여자의 남자친구한테 말함으로써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안팎으로 다 터진 이 상황을 만든 네가 굉장히 충동적이고 잘못했다’라고 했다.​

자신이라면 자신의 친구들에게도 그냥 헤어졌다고 하지 이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자신의 친구들한테 진실을 말한다 한들 ‘그럴 수도 있지’라며 이해해 줄 것이라고 했다. 하긴, 그의 친구들 중에는 여자는 ‘좆집’이라고 표현했던 사람도 있었기에.​

​​

나는 너무 황당하여 너는 안주은이랑 그 짓을 일주일에 두세 번이나 하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냐고, 아침 드라마 단골 소재가 카페에 앉아서 얼굴에 물 뿌리고, 김치 싸대기를 때리는 장면인데 그 장면들이 괜히 나온 줄 아냐고 네가 좋아하는 빅데이터 아니냐고 하자 “그래도 네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지”라며 한 줄로 모든 대화를 종결 시켰다.​

그러면서 회사에 갖가지 소문이 도는데, 그 소문 중, 바람 관련해서는 결국 진실이 맞지만, 그 여자의 남자친구에 관련된 사건, 예를 들어 ‘자살시도를 했다’, ‘과에 찾아와 이재원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라는 등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 자신은 이제 끝났다고 했다. 누구에게 물어보는 순간, 그 상간남이 자기로 확정되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조용히 다른 시험공부를 하며 지내야겠다는 말도 했다.​

그 와중에 같은 청에 일하는 친한 남자 동료가 “형이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해. 억울해서 어떡하냐, 아니라면 누워서 난동이라도 피워, 우리가 도와줄게”라고 그에게 말했다며, 거기에 대해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 없는 이재원은 마치 괴벨스처럼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못하고 떠도는 소문 중,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한 소문. 즉, 나에 대한 소문은 자신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대답을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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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12월 9일 지방직 스터디 사람들과 공주로 솥뚜껑 매운탕 맛집을 가는 등, 일조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는 등 대단한 행동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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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직 스터디 조원들은 맛집 투어에서 그 구청 안주은의 상대가 너일까 봐 사실 친한 사람들도 묻지도 못하고 곤란해하고 있었다며, 네가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대처하라며 조언 아닌 조언을 해줬다.​

어이가 없었다. ​

나는 그가 자취방을 구할 때까지, 안주은과 한 내 집에서 살게 해줬으며, 내가 할 수 있는 14년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를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뚫린 입이라고 입으로 배설을 마구 했다.​

나는 그에게 “네가 잃을 것 없던 지난 10년 동안은 너의 본성을 숨겼던 거 아니냐.”라고 물었더니 안주은과 몸이 맞기 전에는 전혀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다며 되려 자신의 사회적 매장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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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은 다르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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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라도 된 줄 알았다.​

아니, 못해도 시의원이라도 된 줄 알았다.​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그런 말을 듣고 있는 나는 흔히 말하는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14년 동안 나는 이런 식으로 이재원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아무것도 없는 무직인 그 남자에게 나이키 한정판 신발을 사줘가며, 내가 보고 싶은 대로 포장하고, 지켜주고, 사랑해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의미 없는 설전이 오가는 와중에도 내 차에서는 갈색 긴 머리카락이 발견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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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과의 연애는 이렇게 개같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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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정 시에서의 자신의 커리어는 이미 다 끝났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아무 일도 모르는 국가직 공무원이 되어서 다시 시작을 해야겠다는 말을 하며 이곳은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진짜 지긋지긋 한 건 그 긴 시간 동안 주정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너와 함께 생활하고 모든 것을 나눴던 나인데.​

지난 추석, 대구를 오가는 길, 한마디 없던 그가 찍은 그 하늘 사진은 안주은에게 아래와 같이 전송되어 있었다.

정신과에서는 나에게 진료를 잘 따라오고 있다고 했으나, 끝까지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생각만 하는 그를 보며, 내가 저런 사람을 사랑했었나 싶고,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 모든 상황을 복기하기까지 하곤 했다. 그런 생각을 말하자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그 사람은 궁지에 몰려서 아무 말이나 다 하는 거라고 거기에 대해 정확하게 사실을 말하고, 그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렇다. 지난 14년을 돌아보며 남은 게 하나도 없다고, 내 인생이 송두리째 뿌리 뽑혔다고 생각한 나였지만, 사회적 매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이재원을 보면 난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 작은 다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러면서도 이렇게 개 거지같이 누구보다 지저분하게 연애가 끝났음에도, 이 연애가 끝난 게 믿어지지 않아, 악몽을 꾸다 소릴 지르며 잠에서 깨는 날이 왕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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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과 안주은은 2022년 9월 말 같은 과로 발령이 났었고, 2023년 6월 구청 내의 ‘젊은 피’ 모임의 술자리가 끝나자 안주은이 이차로 초대한 그 여자의 집에서 첫 를 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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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배설한 모든 말에는 항상 거짓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 쌍둥이 임신 등 대화에 대한 진실은 그들 본인만 알리라.

14화

십 사 년

이재원은 내가 우스웠던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 친구가 같은 동, 같은 라인에 사는 아파트에 파트너를 데려와서 를 즐기고, 맥주를 함께 마셨다.​

물론 내가 10개월 할부로 산 TV로 둘이 넷플릭스를 시청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봉명동 내 친구네 집에 놀러 가기도 했었다.​

물론 내 친구 집은 안주은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이며, 이재원은 안주은이 예약한 소고기집에서 술과 고기를 잔뜩 먹고 왔었다.​

친구네 건물에는 안주은을 좋아한다던 구청의 다른 직원도 살고 있다. 이재원은 10월 11일 나에게 쫓겨났을 당시 그 직원의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

안주은은 나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하지만 안주은은 나와 장장 다섯 시간의 대화를 한 날, 본인이 원해서 나와 대면으로 만남을 한 날, 그날 이후로도 이재원에게 연락하여 자기 집 오는 날짜까지 정해주고 잠을 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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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를 지칭하는 본업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를 하다가도 본업이랑’도’ 해.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본업이랑’도’ 먹어. ​

운동을 한다는 이재원에게 “본업이랑 데이트함?”이라며 끊임없이 나를 조롱했다.​​

나는 이제 그들을 떠올리며, ‘나였다면’ 혹은 ‘나라면’이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애초에 그들은 나와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까.​

나는 이재원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내가 지난 14년간 사랑한 내 남자친구 이재원은 죽은 거라고. 내 앞에 있는 너는 지금 그저 창놈 일뿐이라고.

​그러자 그는 바람은 안주은 이랑만 피웠으니 자신은 창놈은 아니라는 답변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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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주은에게 몇 번이고 물어봤다.​

지원이, 지이는 뭐냐. 너희가 말하는 이태리를 가기 전에 빌드 업을 한다는 게 뭐냐.​

너 혹시 임신했냐. 그 여자는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간헐적으로 “죄송해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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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은 안주은이 아니었어도 누구와라도 그랬을 것이고, 안주은은 이미 이재원이 아니어도 그러는 중이었다.​

‘그들이 혹시 내가 글을 써서 상처받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큰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히히덕거리며 그걸로 농담 따먹기를 한 사람들이다. ​

카카오톡 내용을 보면 그저 2월까지 서로를 청산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 뿐이었다.

안주은과 이재원에게 각각 말한 적이 있다.​

그 구청 안에서 너희들이 뭐라도 된 줄 알고, 세기의 인기를 얻은 줄 알고 나대는 거 그거 진짜 우스운 거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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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싸’라 불렸다던 너네 둘이 한 짓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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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 어른들, 팀장 과장급에 사랑받으며 노래방과 음주를 사랑하던 안주은과, 옷을 잘 입고 ‘착하다’고 인기있던 이재원과 그 좁디좁은 세계에서 영원히 꼬리표가 되어 쫓아다닐 거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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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에 있을 인사이동만 기다리는 너네들에게,​

나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나온 것처럼 가장 오래된 소문이 되어 곁에 아무도 없어 외로울 너네와 언제든지 함께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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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거기에 대해 복기하는 것도 나에게 득이 될 건 없다. 그렇다고 회피하는 것도 나에게 득이 될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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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선택과 판단들이 그 14년을 만들었고, 나는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 ​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고, 그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또다시 살아갈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듯한 차 한 잔, 맛있는 저녁 한 끼를 먹으며, 안이와 산책을 하고 시간에 맞춰 주사를 놓아주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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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달을 돌아 본다.​

나는 많이 우울했고, 또 가끔은 웃었으며, 희망에 찼었고 그 희망을 버렸었고, 작은 행복을 느꼈고, 큰 절망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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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이 감정들은 사실 언제나 나와 함께했던 감정들이다. ​

저들이 나를 벼랑 끝에 내몰지 않았을 때도 나와 함께 했던 감정들이다.​

앞으로는 내 감정을 더 소중히 기록하고 돌아보고 또 성장할 것이다.​

최악의 2023년이라고 생각했던 나지만 사실은 그들에게서 벗어난 2023년을 감사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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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느라 연락이 안 되자 내가 어떻게 됐을까 봐 목포에서 일하다가 그냥 고속도로 타버린 내 동생과,​ 울고 싶은 만큼 울라고 주저앉은 나의 등을 토닥여주고, 30대 중반이 된 딸의 밥을 챙기며 한 숟가락만 떠도 잘 먹는다고 칭찬해주는 나의 엄마, (평소에는 제발 그만 먹으라고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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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락이 없자, 가게 문을 급히 닫고 울면서 내 집에 찾아와 문 열라고 소리치고 주차장에 내 차를 확인하는 ​

(그 전주에 혹시 몰라서 내가 집 비밀번호 알려줬지만 까먹은 듯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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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엄마와 통화한 소식을 듣자 대화방에는 말 안해놓고 친구에게 전화해서 샤우팅하며 속상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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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더 감정적이고, 마음 약하면서 안 그런 척 자꾸 전화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오늘 기분은 어떻냐며 내 일상을 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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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글자도 잘 안읽으면서 나한테 도움되겠다고 법 같은거(네이버 지식인) 찾아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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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귀여운 양말이 담긴 소포를 보내고 아침저녁으로 내 안부를 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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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만 하면 구청에 전화하겠다고 내 안녕과 그들의 눈물을 기원하는 내 든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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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생활에 직장 생활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내 끼니만 챙기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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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을 게 필요하면 뭐라도 씹으라고 먹태를 보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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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시청에서 우연히 그놈을 만나자 눈을 부라리며 째려봤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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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만나서 상담받으라고 내 손에 돈을 쥐어주는 파워 ‘T’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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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대신 구청 앞에 가서 돌아가면서 피켓 시위하겠다고 순번을 정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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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서라도 필요하면 도와주겠다고 본인의 합의서를 냅다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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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말고 너 하나만 생각하고 치료 잘 받고 술이나 한 잔 하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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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챙겨먹을까봐 반찬이랑 과일 바리바리 챙겨다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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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글을 쓸 때 한밭시라고 하자 너무 티난다고 걱정하며 소전시는 어떻냐고 해서 날 웃게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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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걸 우연히 알게 되자, 도와주겠다며 얼굴도 모르는 언니를 응원 해주는 든든한 여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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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나 사랑받고, 응원받고, 지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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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에게 말했었지. 너는 피해자니까 ‘불쌍’해서 주변에 사람이 있지만, 나는 지금 아무도 없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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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네가 미쳐 깨닫지 못한 건, ​

네가 있던 나의 반쪽짜리 14년은 의미가 없을지라도, 나머지 반쪽은 이렇게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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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래서 앞으로도 웃을 것이고, 울 것이고, 사랑할 것이고, 모든 감정을 느끼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

내 밤이 너무 길어서 울고 절망했을지라도, 그 밤 끝에 올 아침이 기대되어 나는 잠이 들 것이고, 일어나서 걸을 것이다.

[출처] 본업과 주유 (사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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